어거스틴은 근본적으로 성서적인 관점에 서서 사랑의 이론을 역설한다. 어거스틴의 사상과 그의 인간이해는 일반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에 있어서 비인격화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의 이론에 있지 않다. 비인격화의 문제는 어거스틴이 하
성이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교 계시의 이지적, 학문적 설명이었고, 이전환기를 주도한 인물이 성아우구스티누스였다. 성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을 그리스도교 안에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고대와 중세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고대의 위대한 마지막 사상가
성을 그 시대의 경건한 유대인과 다르게 이해했다. 메시야 희망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피안으로부터 오는 것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차안(此岸)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들의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지상적 소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연적인 생활의 단
사상적인 인류의 유산으로 만들고 있다. 그가 시도하는 고매한 이상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고백록>을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 내게 한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20세기는 매우 유사하다. 로마제국 붕괴와 몰락은 서구문명의 몰락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위기감을 그에게 주었다. 어느 시대에나 삶의
성 신격화’라는 하나의 거짓된‘신’을 앞장세운 주체사상으로 정당화 되고 있다. 종교의자유가 사실상 부정되고 있는 북한사회에서, 이러한 집단적인 종교성을 띠는 현상은 모순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체제와 독재의 정통성 유지에 종교성을 이용한 김일성 신격화는 뗄래야 뗄 수 없으며,
어거스틴은 374년부터 10년간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학교를 운영하다가 로마에 왔다. 로마에서의 수사학 학교는 별로 운영이 되지 않아서 밀라노의 공립학교에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마니교에서는 인간사고의 확실성 근거나 선악이 충돌하는 이유를 밝혀주지 못하였으므로 회의를 느끼던 차에 암부로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의해서 촉진된 것이고 (초기 스콜라 학자들은 그들의 방법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배운바가 많았다.) 보수적 형식이긴 진보적 형식이건 간에 중세기의 신비주의도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에서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는 이처럼 서구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아우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다우라(Madaura)와 카르타고(Karthago)에서 공부했으나 그의 훌륭한 재질과 사려깊은 그의 어머니의 경건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방탕한 청년들의 생활방식과 마니교의 오류에도 빠졌는데 그는 9년이나 이교를 지탱하고 포고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공적이 아니었다. 철학적인 학
성취하였다. 이 책에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신학에 대한 성숙하고 매우 포괄적인 개관을 남겼다. 어거스틴을 이해하기 위한 그의 사상의 발전단계를 다음 일곱 가지 단계로 나누어 살피면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첫째, 어거스틴은 새로운 전통, 곧 그리스도교적 전통과 연결시켜준 경건한 그리스도교도
성 모니카이다. 라틴어 문법과 「말 잘하는 기술」에 뛰어났던 어거스틴은 열 여섯의 나이에 북아프리카의 수도 카르타고로 유학을 갔다(370년). 그곳에서 한 여인과 동거에 들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얼마 있지 않아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얻었다(370/1년경). 떳떳하지 않은 동거 생활은 14년 동안이나 계